한국문학번역원 로고

kln logo

twitter facebook instargram

Lines

Essays

  1. Lines
  2. Essays

[Cover Feature] Breathe, Live, Rest

by Ju Minhyeon Translated by Giulia Macrì March 1, 2024

숨 쉬기, 잘 쉬기, 잘 살기

 

 

    ‘숨구멍’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았을 때 정말로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안소현 작가의 개인전 <유영하는 마음>에서 본 그림이었다. 커다란 건물에 난 작은 창에 한 사람이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작은 창문이 때로는 얼마나 큰 숨구멍이 되어주는지 모른다. 건물 위로 펼쳐진 하늘은 무척 아름답고 서정적인 빛깔이었다. 

    내게도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시간이 있다. 그런 날엔 의식적으로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고 어떠한 할 일도 만들지 않는다. 알람 소리 없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우선 집 안을 열심히 쓸고 닦는다. 깨끗해진 집 안을 바라보며 창밖으로 햇살이 쏟아지거나 눈이 펑펑 내리는 걸 구경한다. 그럴 땐 텔레비전도 틀지 않고, 음악도 잘 틀어두지 않는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한다. 창문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걸 고요히 느낄 뿐이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면 의욕적으로 살아낸 하루보다 더 마음이 충만하고 단단해진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머릿속엔 늘 다음 날 해야 할 일이나 쓰고 있는 원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목이 뻣뻣하게 굳어 옆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단순히 잘못된 자세로 잠을 자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증상이 가라앉지 않고 더 심해지기만 했다. 스트레칭을 하면 할수록 목에서부터 어깻죽지 아래까지 통증이 뻗어 내려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한의사는 목과 어깨, 허리까지 여기저기 꾹꾹 눌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도 자주 목이 아프고 어깨가 결리죠? 늘 뭔가를 할 때 신경을 많이 쓰고 마음을 많이 쓰고요.” 점쟁이처럼 몸의 상태를 짚어내는데 하나하나 맞는 말이라 그만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는 나에게 어깨에서 짐을 내려두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낮에 열심히 집중해서 일하고 밤에는 완전히 이완된 상태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픈 거라고 했다. “담은 시간이 지나면 풀릴 거예요. 그런데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쉴 땐 짐을 내려두기도 하고요. 안 그러면 계속 아파요.” 잘하려 애쓰고 있다고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의 몸은 이미 과부하 상태였던 것이다. 어깨와 허리가 자주 아프곤 했는데, 또 어느 날은 입을 벌리면 턱에서 딱딱 소리가 났는데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흔히 겪는 증상이겠거니 하고 방치했다. 

    그때부터 일하기와 글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동안 수영을 열심히 하다가 요즘은 가끔 달리기를 한다. 밤에 나가서 무작정 20분 정도 달리는 것이다. 밤에 달리면 어두워서 좋고, 어둠 속에 얼굴을 숨기고 달리기에 좋다. 놀라운 건 나 말고도 어둠 속을 걷거나 달리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달리기는 심장과 폐에 좋고 다리에도 좋다. 무엇보다 달리기는 마음 건강에 좋다. 그저 내딛는 한 발, 그다음 한 발에 집중하다 보면 걱정하던 일들을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개운한 느낌이 든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꾸준히 배우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고 틈틈이 배운 곡을 연습한다. 취미로 배우는 것이므로 엉망진창으로 연주해도 ‘재밌다’고 순수하게 즐거워하면서. 바이올린 악보에는 쉼표가 있다. 연주할 때 쉬어가라고 쓰인 곳에서 어떠한 소리도 없이 쉴 때 그다음 소리가 훨씬 잘 들린다. 여리고 작게 연주하는 부분에서는 충분히 볼륨을 낮추어야 강조하는 음이 잘 들린다. 잘 연주한 음악은 잘 쉬어가는 음악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조금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눈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모든 게 경쟁이잖아요. 버스 잡아타는 것도, 지하철 타는 것도, 식당 예약하는 것도요.” 얼마 전 누워서 팟캐스트를 듣다가 한 패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안 그런 나라나 도시도 분명 많겠지만 고도로 발달한 도시 풍경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긴 출퇴근 시간, 반복적인 노동, 어딜 가나 사람이 많고 무엇을 하든 경쟁인 삶. 쉬고 있어도 더더욱 쉬고 싶고, 숨만 쉬어도 지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출근길 지하철에 탄 사람들의 얼굴은 특히나 고단해 보인다. 자리에 앉아서 가기 위해 서로 다투는 것도 종종 본다. 모두 지치고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롭다. 나 역시 그 틈바구니에서 몇 년을 보냈다.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 등단한 지는 7년 차. 지난해는 살면서 가장 많은 책을 편집한 해였다. 여름에는 시인으로서 두 번째 시집도 출간했다. 다른 사람의 원고를 살피는 동시에 퇴근하면 나의 원고를 바라보는 생활이 처음도 아닌데 유달리 지치고 힘들었다. 사소한 결정도 내리기 어렵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침에 눈을 뜨면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이런 게 번아웃인가?’ 싶었다. 

    한동안 바이올린에 마음을 쏟으며 지내는 것 말고는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았다. 글도 거의 쓰지 않고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래도 음악과 관련한 책에는 흥미가 끌려 몇 권 연달아 읽었다. 음악은 나에게 새로운 영토를 보여주었다.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주세요』를 읽으며 한 피아니스트의 내면을 천천히 따라가 보았고,『크레모나 바이올린 기행』을 읽으며 저마다 다른 나무로 만들어져 각기 다른 음색을 지닌 무수한 바이올린을 상상했다.  『슈베르트』를 읽을 땐 세계적 작곡가인 슈베르트가 얼마나 많이 실패했는지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실패는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실패했다는 건 그만큼 진지하게 고군분투했다는 뜻이므로.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에게 쉼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순정한 시선을 다시 회복하는 시간이다. 신기하게 푹 쉬고 나면 무언가 내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마구마구 생겨난다. 내가 본 것, 생각한 것,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것들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더더욱 잘 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태풍이 와도 출근하고, 아파도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게 한국인의 근성이다.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쉬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고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서도 그게 가능한 것처럼 우리는 살아간다. 내게도 쉼이란 간절히 원하는 것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운 것이었다. ‘일을 그만두면, 글쓰기를 그만두면, 영원히 다시 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잠깐 쉰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늘 그랬다. 그게 어깨와 목을 아프게 하고, 허리를 망가지게 하고, 또 어느 날은 마음을 지치게 만들어 완전히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시 쓰는 친구들에게 쉴 때 무얼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한 시인은 집에서 은둔하며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나 책에 몰두한다고 했다. 다른 시인은 캠핑을 하거나 어딘가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상상해 보니 그 모든 삶이 정말 그럴싸했다. 숲에서 모닥불도 피우고 맛있는 것도 구워 먹으면 얼마나 멋질까. 좋아하는 책에 파묻혀 있는 것도 정말 근사하겠지. 평소에 나도 ‘무엇을 하면서’ 쉬곤 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좋아하는 것을 읽고, 맛있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장소에 가는 것. 하지만 정말 ‘번아웃’이 왔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어떠한 계획도 없이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

    연말에는 남은 연차를 붙여 신년까지 쭉 쉬었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렸고,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내려오는 게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역재생한 음악처럼. 그게 인생의 리듬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무릎에선 강아지가 잠을 자고, 평화로운 풍경의 고요가 마음에 들었다. 늘 도서관으로, 수영장으로, 미술관으로, 아니면 저 멀리 정처 없이 어딘가를 떠도는 걸 참 좋아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어떠한 음악이나 미디어도 없이 그저 혼자인 자유가 좋았다.

    그 무엇으로도 섣불리 나를 채우지 않는 고독이 주는 미감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멋지고 근사한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집 앞 산책을 충분히 천천히 즐기는 것도 새로운 기쁨일 수 있다. 좋은 책을 쉴 새 없이 읽는 게 아니라 잠시 모든 텍스트에서 떠나 있는 게 행복할 수 있다. 많은 친구와 함께인 것도 좋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있는 고독을 누리는 것도 충분히 괜찮다. 그런 마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푹 쉬니 늘 오가던 장소, 늘 변함없는 일상이 새롭게 보였다. 

    나아가기 위해서, 도약하기 위해서 잠시 쉬어가는 그런 쉼이 아니라 그저 온전한 형태로서의 쉼, 그것은 온전히 아무것도 아닌 나에 대한 받아들임이기도 하다. 존재의 자유로움, 그리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음, 아메바 상태로 되돌아감. 그렇게 쉼이란 고유의 나로 되돌려 놓는다. 유년 시절로, 세상의 많은 것을 좋아하는 데 거침이 없던 20대 초반의 시절로, 그저 마음속에 사랑뿐이었던 시절로, 조금 더 단순하게 사물을 바라보던 시절로, 글쓰기의 순전한 기쁨이 있던 시절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글쓰기는 때때로 고요한 웅덩이와 같아서 아무런 응답이 돌아오지 않고, 아무런 반향도 남기지 못한다. 그 응답 없음의 자리, 비워둔 자리를 그대로 비워두기. 홀로 있음의 고독을 무서워하지 않기. 그 고독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기. 나 홀로 고독한 시간을 잘 보내기. 그것을 점점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서 한의사의 말대로 어깨의 짐을 내려두고 어떤 꿈도 없는 칠흑 같은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잘 쉰다는 것’은 그저 ‘다시 잘 움직이기 위한’ 준비동작이 아니다. ‘비운다’는 것은 ‘잘 채우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다. 한국어로 ‘쉬다’라는 말에는 ‘휴식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라는 뜻도 있다. ‘잘 쉰다’는 것은 ‘숨을 잘 들이마시고 내쉬어 몸을 텅 비게 둔다’는 뜻이기도 하다. 몸의 휴식은 마음의 휴식으로 이어지고, 마음의 휴식은 곧 다시 몸의 휴식으로 이어지는 순환이다. 쉼으로써 비어 있는 자리를 그저 비어 있게 두는 것, 그게 곧 ‘살아 있기’의 다른 말 아닐까. 무엇을 잘하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로 존재의 행복과 충만함을 느끼는 것, 현재의 몸과 마음에 집중하는 것, ‘잘 쉬기’란 그 자체로 ‘잘 살기’인 것이다. 

    생일이 있던 9월에는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다. 회사에서 맡고 있던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새벽까지 붙잡고 있던 원고를 끝내고, 그렇게 떠난 여수 바다는 살면서 본 바다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4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숙소까지는 택시를 타고 또 조금 가야 했다. 호텔방 커튼을 걷자 반짝반짝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알록달록한 돌담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자 비로소 다른 동네의 다른 풍경, 다른 생활이 보였다. 매일 회사와 집 오가기를 반복하던 나에겐 숨통이 트이는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별다른 계획 없이 설렁설렁 걸어 다니며 팥빙수도 사 먹고 고양이도 바라보며 온전한 휴식이 주는 기쁨을 만끽했다. 

    비어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새로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생겨난다. 비어 있는 것의 아름다움. 줄글보다 여백의 아름다움, 그건 시가 주는 묘미이기도 하다. 채워 넣기보다 빼냄으로써 생겨나는 공백이 재미있다. 시는 놀이이고, 내면의 고백이고, 세상의 모든 풍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쓰지 않는 시간을 지나고 나자 시 쓰기가 더 좋아지고 소중해지고 재미있어졌다.  

    번아웃을 겪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어떤 마음이든 잘 쉬면 회복된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 타인을 향한 너그러운 마음, 다시 쓰고 싶은 마음, 일어서고 싶은 마음은 언젠가 다시 차오른다. 그저 순수하게 쉬었을 때에야 차오르는 마음인 것이다. 나는 일로부터, 글쓰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라 늘 한결같은 내 마음의 풍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너무도 지겨운 ‘나’라는 사람, 어제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사람의 내면이 사실은 계속 변화하고 있는 걸 모르고 말이다. 

    “왜 시를 쓰세요? 시를 쓰는 건 고독할 것 같아요.” 누군가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땐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 쓰기란 내면의 고독을 들여다보는, 삶의 공백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행간을 비움으로써 행간을 채워나가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잘 쉬고 나니 비로소 알게 된다. 이렇게나 많은 대답이 생겨난다는 것을.

 

 

주민현 

2017년 『한국경제신문』 시 부문으로 등단. 시집으로 『킬트, 그리고 퀼트』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가 있다.  「켬」 동인으로 활동한다.

 

Did you enjoy this article? Please rate your experience

SEND

Sign up for LTI Korea's newsletter to stay up to date on Korean Literature Now's issues, events, and contests.Sign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