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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 to Face with Choi Eunmi

by Jung Yong-jun Translated by Sean Lin Halbert March 1, 2024

최은미와 마주

 

 

최근 출간하신 장편소설 『마주』에 관한 질문부터 해보고 싶습니다. 이 작품에는 코로나19에 점령당했던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절대로 알 수 없고 감지할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의 서사와 감정의 기록도 담겨 있습니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땐 작년 여름 '코로나(이후) 시대의 삶, 연결과 단절'이라는 주제로 작가 포럼에서 함께 나눈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코로나를 “함께 겪었던 시간, 하지만 오롯이 홀로 겪어야만 했던 시절”이라 표현하셨죠. 국가적 재앙을 개인의 책임과 몫으로 돌리는 것, 그리하여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답답해하셨습니다. 함께 겪지만 혼자 겪는다는 그 고립감에 저는 깊이 공감했습니다. 

 

코로나를 주제로 한 포럼 얘기를 해주셔서 저도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코로나 블루라고 하는 저조한 감정이 이 시기의 모두가 겪는 감정이라는 점이 위안이 되다가도, 내 마음과 감정이 내 경험과 서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싫기도 하다는 말씀도 떠올랐어요. 포럼에서 만났을 때 저는 한창 『마주』를 집필 중이었고, 그날 작가분들, 독자분들과 여러 얘기를 나누면서 장편에 대한 의욕과 부담을 동시에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마주』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을 때 한숨이 절로 났습니다. 나리와 수미, 만조 아줌마. 공방과 병원, 딴산의 사과밭. 인물과 장면에 깊게 이입되어 어느새 무엇인가 잔뜩 물들어버린 제 마음은 무거워졌고 어째서인지 떨렸습니다. 작가님께서는 팬데믹 상황에서 혈연의 신뢰도는 높아지지만 낯선 이의 신뢰도는 낮아진다고 하시면서, 사회적 사건이나 문제가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오면 오히려 쓰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로나19와 팬데믹의 어떤 경험이 이 소설을 쓰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재난 상황일수록 여러 문제가 개인이나 공동체보다 가족 단위로 수렴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어요. 혈연과 타인의 신뢰도에 대한 얘기는 아마도 팬데믹 기간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를 분석한 기사를 인용하면서 한 말일 것입니다. 기사에서는 혈연집단에 대한 ‘신뢰’라고 표현했지만 저는 이것이 비상 상황일수록 가족 단위로 운명을 묶는, 그래서 재난 상황일수록 가족 단위로 ‘고립’되는 현상이라고 받아들였어요. 가족이 운명공동체가 되면 가족구성원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책임과 돌봄과 통제와 억압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죠. 그 안에서 각자가 외로워지고요. 저는 『마주』의 고립된 인물들이 가족 바깥을 상상할 수 있기를, 새로운 양식의 관계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가족 단위의 고립에서 조금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 혈연이 아닌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 재난을 겪으면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느꼈고, 그것을 쓰고 싶었어요. 

 

 

『마주』는 고립되는 개인에게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공동체의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웃과 낯선 이에게 손 뻗기를 포기하지 않는 연대의 감각 말이지요. 이토록 비정하고 힘든 개인화한 세계 속에서 가능한 공동체의 상상력은 무엇일까요?

 

『마주』의 첫 문장은 “나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적이 있다”로 시작되는데요, 책을 내고 난 뒤, 그 문장을 처음 쓴 2020년 겨울과 탈고한 2023년 초여름 사이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소설을 시작할 때는 미처 몰랐지만 다 쓰고 난 뒤에 이해하게 되는 소설 속 요소들의 동기나 이유에 대해서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보면 상대가 나와 얼마나 다른 타인인지를 바로 실감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 기이함과 낯섦, 낯섦을 포함한 접속의 감각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그후 2, ~3년 동안 재난을 겪는 인물들을 쓰면서 저는 저 문장이 관용구로서 갖고 있던 의미나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말한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한다”는 말에 대해서도요. 마음에서 저절로 일어나고 솟구치는 종류의 이입을 넘어서 주저되더라도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노력과 학습의 영역으로서의 이입에 대해서요. 

     타인에 대한 낯선 실감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로 썼던 첫 문장이 소설을 끝내고 나니 고립을 뚫고 연결되기 위해 이 인물들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이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보는 것, 그 마음을 내는 것. 우리가 공동체의 가능성을 상상할 때 가장 필요한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이 아닐까요. 

 

 

『아홉번째 파도』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석회 광산, 원자력발전소, 사이비 종교 등 작가님의 소설은 사회적 상황과 현실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소설의 배경과 이야기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물은 굉장히 개인적이고 내밀하게 다루어집니다. 세계의 조건과 한 인간의 삶은 연결되어 있고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지금의 세계와 현실의 사건이 들어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홉번째 파도』를 구상할 무렵이었어요.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큰 재난이 일어난 뒤 방사능으로 인한 먹거리 공포 등이 퍼지면서 제 일상이 재난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실감을 강하게 했었습니다. 가까운 이들이 살고 있던 한국 동해안의 한 소도시가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 아래 핵발전소 유치를 둘러싸고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고요. 지금까지 이어온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되짚게 하는 세계적 재난 속에서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한 사람의 하루, 관계, 감정 등을 그려보게 되었고, 그 순간에 소설을 추동하는 강한 에너지를 느꼈어요. 그 에너지 속에서 『아홉번째 파도』를 쓰고 현실과 사회에 반응하는 한 개인을 좀 더 민감하게 자각하게 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후에 이어진 페미니즘 리부트나 코로나19 등 사회적 상황이 현실의 제게 큰 영향을 끼치면서 그게 소설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되었고요. 

     다만 『아홉번째 파도』를 쓸 때와 『마주』를 쓸 때를 비교해 보면 소설에 담긴 사회적 사건과 그것을 겪는 현실의 나, 그것을 소설로 쓰는 나 사이의 거리감에 따라 소설이 작동하는 양상이 달랐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자에게도 그 차이가 느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주』를 쓰고 나니 저에겐 느껴졌어요. 『아홉번째 파도』를 쓸 땐 재난에 심리적·시간적 거리를 확보한 채 접근할 수 있었지만 『마주』를 쓸 땐 그 재난을 실시간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선명함의 가장자리를 지우는 게 쉽지 않았어요. 소설이 그 자체의 유기성으로 움직여야 하는 순간에도 현실의 제게 절실한 문제들이 소설 속으로 계속 비집고 들어가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으로 만든 사람』 『목련정전』 『너무 아름다운 꿈』을 생각해 보면 작가님의 소설 속엔 공포와 폭력의 세계에서 끔찍한 것들을 겪어내는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저도 한 명의 작가로서 왜 그런 끔찍한 것들을 끌어와 쓰느냐는 말과 함께 그런 소설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소설이 그런 세계를 정확하게 그려내고 한 인물을 충실히 다루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답하는데요. 새삼스러운 질문이지만 이런 세계 속에서 소설이 갖는 의미와 힘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떻게 보면 소설은 쓰는 사람의 내적 동기가 가장 먼저라고도 볼 수 있죠. 그게 없다면 그 소설은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한 작가가 폭력적 세계와 끔찍한 실상을 계속 들여다보고 쓰게 되는 건 작가 자신도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쓰도록 추동하는 것을 계속 쓰고, 다르게 쓰고, 또 쓰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소설 안에서 작가 자신도 몰랐고 독자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의미가 생성될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주제를 다루든 고유의 생명력으로 움직이면서 자체의 의미를 발산하는 소설을 읽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요? 그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감각할 수 없었던 타인의 삶에 대한 실감이나 세계에 대한 이해, 그를 통한 관점의 확장은 덤으로 따라오는 유의미한 무엇일 것입니다. 

 

 

신문에 연재하고 계신 ‘마음읽기’를 재밌게 따라 읽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말해보는 일’이라는 칼럼에서 외로움에 관한 인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겪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과 문제의 한복판에 외로움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외로움은 사회적 차원에서 사유돼야 할 감정임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에 적극 동의하면서도 사회적 차원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지 궁금해졌습니다. 

 

얼마 전 한 시사 잡지 송년호의 올해의 사진란에 짧은 글을 실으면서 이런 문장을 썼어요. “교사의 외로움과 학생의 외로움과 학부모의 외로움은 만날 수 있을까.” 2023년 여름 초등학교 안에서 신입 교사가 사망한 일이 있었을 때 그 사건에 접근해 가는 여러 시각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 ‘외로움’이었어요.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각자의 자리에서 외로운 채로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외로움은 분노의 방향을 잃게 하고, 어떤 외로움은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조차 못하죠. 방향을 잃은 감정들이 서로를 다치게 하는 동안 이 사태를 야기한 구조는 당사자가 아니라는 듯 물러나 있습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곳곳에서 이런 사회적 외로움이 몸을 키워가는 걸 보았고, 이 외로움들이 연결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누구와라도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외로움들이 연결되는 방법'은 저 역시 최근 굉장히 많이 생각하는 지점이어서 깊이 동감합니다. 외로움은 더는 개인적 문제나 정서 차원이 아닌 사회적으로 고민해 봐야 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것에도요. 저는 클래식하지만 정서와 취향의 공동체를 찾는 동호회나 취미 모임이 떠오릅니다. 독서 모임이나 글쓰기 모임도 좋은 방법 같고요. 의견 한 가지만 공유해 주세요.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도 정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작가라서 그 효능을 더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함께 모인 사람들뿐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갈래의 세계와 연결되는 데에 읽기와 쓰기만 한 일은 없을 거예요. 문학 텍스트뿐 아니라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적 의제에 따라 여러 종류의 논픽션을 함께 읽고 써보며 작은 정치적 실천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요. 강아지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좀 더 자주, 더 긴밀하게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과 만나는 식으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더 생각하고 얘기를 나눌 계기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사학과로 입학한 후 문예창작학과를 복수 전공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언제 어떤 마음으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2008년 등단 후 16년 정도 글을 써오셨는데 가장 많이 달라진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려서부터 혼자 이런저런 글을 쓰는 걸 좋아했는데 쓰고 보면 거의 픽션 형태였어요. 픽션을 읽고 쓰는 걸 좋아했지만 저는 소설가보단 늘 역사학자나 고고학자가 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제가 애초에 역사를 좋아한 게 이야기로서의 역사인 것 같기도 해요. 소설을 계속 쓰면서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대학에 들어와 창작 수업을 들으면서부터였고요. 제 소설을 합평하는 주가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졸업한 후로는 무엇을 하고 있든 한 번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내려놔 본 적이 없어요. 

     막 등단했을 때도 지금도 소설을 쓰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외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등단 초기보다는 독자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더 실감할 수 있다는 점이 위안이 되지만 소설을 쓰는 제 심리 상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소설을 쓰는 동안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소설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소설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 때, 그때는 심박수나 몰입도 자체가 달라지고 노트북을 닫고 있을 때에도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속 인물에 대한 갈망을 내내 느낍니다. 어떤 시기에는 쓰는 소설마다 이 심박수가 나를 사로잡는 느낌이지만 어떤 시기에는 소설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차오르지 않을 때가 있어요. 내면이 평평해지는 느낌, 종잡을 수 없는 활기 대신 인과가 분명한 플롯만이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 내가 소설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 그럴 땐 그 상황을 늦지 않게 알아채고 저 자신을 돌보기 위한 에너지를 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번 KLN의 키워드는 숨, 쉼, 빔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분주한 나날 속에서, 숨을 쉬고 쉼을 얻고 비어 있는 여백을 느끼게 하는 문학의 가치를 생각해 보자는 의미인 것 같아요. 작가님께 문학이 갖는 의미 중 ‘숨’과 ‘쉼’과 ‘빔’의 영역이 있다면, 그런 경험이 있다면 나눠주세요.  

 

아이가 유치원생 무렵이었을 거예요. 하루는 아이가 고열이 나서 중간중간 해열제를 먹으며 하루 종일 저에게 기대 잠을 잤어요. 저는 그 무렵 늘 종종거리며 바빴는데 그날은 아픈 아이가 제게 준 진공 같은 날이었던 걸로 기억이 나요. 온몸이 뜨끈뜨끈한 채로 자는 아이 옆에 앉아서 한 작가의 소설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작가의 몇 년간에 걸친 집필 시간이 담긴 책이었어요.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는 것도 아니었고, 그가 반복해 쓰는 테마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저는 그날 해가 기울도록 앉아 그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무엇을 써왔는지를, 그가 그려온 세계를 비로소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책에 몰두해 있는 동안 제가 저 자신에게서 놓여날 수 있었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자기 자신으로 가득 들어차는 상태에 피로를 느낄 때 기꺼이 몰입해 들어갈 수 있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숨이자 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으로 가득 들어차는 상태에 피로를 느낄 때”라는 문장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저는 '분주함'을 느낄 때 숨, 쉼, 빔이 고파집니다. 여기에서 분주함이란 내가 원하는 세계에서의 바쁨이 아니라 내가 원치 않는 세계에서의 부름과 요청으로 바쁠 때를 말하는 것 같아요. 사느라 바빠서 읽지도 쓰지도 못하면 금방 지치고 고단해지곤 합니다. 이렇게 분주하게 사는 현대인에게 권하고 싶은 방법이 있다면요.

 

원치 않는 세계에서의 부름과 요청으로 지치고 고단해지는 일상에 대해 해주신 말씀이 여러 생각을 불러오네요.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으로, 또 각자의 상황에 따른 각자의 이유로 숨과 쉼과 빔이 절실할 거예요. 저는 숨과 쉼과 빔이 절실할 땐 뇌를 최대한 단순화하거나 아예 쓰지 않는 방법을 택하는데요. 잠을 자거나 운전을 하는 식으로요.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생각 자체를 잠시라도 멈출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현재와 멀고 건조하게 기록된 글을 읽어요. 가령 『삼국사기』를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보는 식으로요. “법흥황 5년 2월에 주산성을 쌓았다.” “5월에 왕궁의 우물에 용이 나타났다가 잠시 운무가 사방에서 모이더니 날아가 버렸다.” 이런 문장들을 읽습니다.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와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독자 최은미의 문학적 경험이 궁금합니다.

 

펼쳐볼 때마다 떨리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소설이 있어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Beloved)』입니다. 『빌러비드』의 구조는 독자가 이 세계에 쉽게 진입하지 못하도록 호흡을 가다듬고 준비하게 합니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일, 그날, 그 존재에 다다르기 위한 우회적 구조 자체에 매혹되곤 합니다. 그 구조 안에서 이름과 목소리에 대한 너무도 풍부한 의미들이 중첩되고요. 근래의 작업과 관련이 있어 요사이 자주 펼쳐본 부분은 재기억에 대한 부분이에요. 

     “내가 그걸 생각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내가 죽더라도, 내가 했거나 알았거나 본 일들의 광경은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거지. 그 일이 벌어진 바로 그 자리에. [. . .] 어느 날 길을 걷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혹은 뭔가 눈앞을 스쳐 지나갈 때가 있잖아. 아주 선명하게. 그럼 넌 네가 그걸 떠올렸다고 생각할 거야. 네가 머릿속에서 끌어올린 광경이라고. 하지만 아니야. 그때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재기억과 우연히 맞닥뜨린 거야. 여기 오기 전에 내가 있었던 곳, 그곳은 정말 있어. 절대 사라지지 않아.”

 

 

아직 번역되지 않은 한국문학 작품 중 여러 나라 독자들과 함께 읽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요? 

 

안보윤 소설가의 최근 소설집 『밤은 내가 가질게』가 떠올랐어요. 작가님이 이전 질문에서 말씀하신, ‘폭력적 세계를 정확히 그려내고 한 인물을 충실히 다루어온’ 소설가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안보윤 소설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소설집은 한 작가가 오래, 깊이 들여다봐 온 지점들이 어떤 의미를 생성해 내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집이라고 생각해요. 

 

 

코로나 이후 연결과 단절에 관해 고민하는 포럼에서 작가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재현의 문제 혹은 고통의 문제를 쓰고 싶지만 주저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작가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저 역시도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자기검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격을 고민하고 심문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각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자체를 소설에 담을 수 있다면 먼 곳의 일과 사람에 관해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답을 조금 더 길고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소설을 써오면서 인물들에게 저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투사하면서 쓴 적이 많은 것 같아요.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내가 잘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고,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다른 상황의 인물에 대해 쓰는 것에 두려움도 크게 느꼈던 것 같아요. 쓰는 이로서의 자격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격보다는 쓰는 이가 갖는 자아의 비중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었어요. 소설 속에서 인물에 대한 공감과 이입을 끌어내기 위해 인물들이 서로 투사하게 하거나 쓰는 이의 자아를 투사하게 되는 설정에 신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상화의 위험도 쓰는 이의 자아가 비대해질수록 생길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앞에서 말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본다는 말과도 이어지는 얘기지만 쓰는 이로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타인을 타인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거리감을 정직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용기를 내서 소설 속에서 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주』를 끝으로 “이제는 좀 더 즐겁게 쓸 수 있는 걸 쓰고 싶다고, 내 여자들 이제 안녕”이라고 말씀하셨죠. “이제는 좀 더 즐겁게”라는 문장과 “안녕”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작가님이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와 인물이 궁금합니다. 

 

지난 몇 년간 감정적으로 굉장히 밀착한 채 여성 인물들에 대해 써온 것 같아요. 『마주』를 쓰고 나서는 저 나름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했고, 제 상황과 좀 먼 인물을 쓰고 싶은 욕구가 다시 자연스럽게 생기기도 했어요. 저 자신을 투사하지 않을 수 있는 인물이 지금 가장 쓰고 싶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처음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마음껏 발산했을 때 즐거웠던 걸 떠올려보면 제가 즐겁게 쓸 수 있는 글은 시기마다 저 자신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저는 유년과 10대를 내내 한국의 접경지에서 보냈는데 그래서인지 등단 초기부터 접경지 얘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그동안은 제 소설에 배경으로 잠깐씩만 등장했지만 앞으로 단편과 장편 작업에 집중해서 다뤄보고 싶은 계획을 갖고 있어요. 감정과 기억, 기억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데 『빌러비드』의 재기억에 대해 요즈음 다시 읽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최은미

2008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울고 간다」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눈으로 만든 사람』, 중편소설 『어제는 봄』,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마주』 등을 펴냈다.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정용준

소설가.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선릉산책』, 장편소설 『프롬토니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산문집 『소설만세』 등이 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재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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